2025년 12월 12일

불완전함을 마주할 때

주어진 시공간 속에서

최근에 친척이 시애틀로 이민을 왔다. 자연스레 자주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의사로 일하다 안정된 커리어를 모두 내려놓고 꿈을 좇아 이번 해에 도미했다. 나 또한 한국에서 학부를 마친 뒤 미국으로 건너와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니, 굳이 말하자면 나름의 “야심찬” 모임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식탁에 앉으니, 대화의 흐름도 자연스레 비슷해진다.

“야, 이민 와서 영어 때문에 죽겠어 ㅋㅋ”

“나도 ㅋㅋ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는데, 영어가 늘지를 않더라”

“난 중3부터 시작했어 ㅋㅋ 그것도 학교 수업으로”

왜 우리는 어린 시절에 영어를 더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왜 더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까. 세상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우리의 길은 달라졌을까. 부모에 대한 불만은 자식이 일정한 거리를 두니 더 정교해지는가 보다. 그리고 그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면, 말은 점점 가벼워진다. 마치 선택지가 무한히 열려 있었던 것처럼, 다른 경로가 명확히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잠시 후, 우리는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깨달았다. 결국 우리가 부린 욕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우리 할머니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던 난민이었다. 손에 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내셨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선택지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한정된 조건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가 탓하던 세대가 단순히 최선을 다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우리는 겸손과 감사의 의미를 배웠다.

과거의 선택을 현재의 시야로 재단하는 일이 언제나 쉽고 공허한지. 마치 지도 없이 길을 건넌 사람에게 왜 고속도로를 타지 않았냐고 묻는 듯하다.

당신들의 유토피아

요즘들어 한국은 답이 없다는 말을 귀가 아플 정도로 듣는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이제는 신기할 것이 없다. 나 역시 고통스러웠고,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가슴이 저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미친 듯한 교육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따라잡아야만 하는 자리, 그럼에도 흐릿하고 불확실한 미래. 이런 땅 위에서 느껴지는 피로와 좌절이 결코 이상할 것은 아니다. 불평이 튀어나오는 것은 마치 자연스러운 몸부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묻는다. 한국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이 땅이 어느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조금만 달리 했더라면 지금과 전혀 다른 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외부에서 보면 단순해 보이는 해법들도, 그때의 시간과 현실을 하나하나 놓고 보면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선택지는 늘 제한되어 있었고, 모든 길은 결과만을 남길 뿐이다. 그래서 난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답이 없다”는 것은 현실 진단이라기보다, 상상 속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함에 불과하다. 모든 제약을 제거할 수 있었다면 분명 더 나은 설계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언제나 제약 위에서만 움직인다.

상대성이론

요즘 우리 학문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 불만들이 많은 듯하다.

변화와 속도가 빠른 학문 속에서, 우리는 때로 너무 멀리만 바라보고,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쉽게 지나쳐 버린다. 우리는 스스로를 최전선의 관찰자라 여기며, 자신이 본 일부만으로 전체를 판단해버리고 만다. 그렇게 단편적인 시선으로 전체를 규정하면, 보이는 조각은 실제보다 훨씬 중요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우리의 판단과 결정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곧 자기 확신으로 포장되어, 현실과 어긋나 있음에도 스스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난 그 정도의 깜냥도 안되고, 그래서 아직도 이 분야를 사랑한다.